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골 문자 (문단 편집) == 발견사 ==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은허 지역은 농촌이었다. 종종 밭을 개간하던 농민들의 의해 상나라의 유물인 청동 기물이나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껍질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는 시장에 매물로 팔렸으나 갑골문은 뼈라서 귀해 보이지 않아 매물 신세를 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문들은 한데 모아서 한군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청나라]] [[광서제]] 말년에 [[허난성|하남성]] [[안양시(중국)|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고대 문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문양이 새겨진 뼈라고 여겼다. 뼈는 농사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기에 농민들은 갑골문을 한약방에 팔아버렸다. 이렇게 갑골문은 [[용골]]이라는 약재로 취급받았다.[* 다만 문자가 적힌 은나라 시대 갑골만 용골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고 땅에서 나오는 오래된 뼈나 화석들을 모두 용골이라고 불렀다. 칼에 베인 상처에 가루를 만들어 뿌리거나 학질에 달여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여겼지만 귀한 약재는 아니었고, 원산지에서는 한 근당 동전 몇 푼 정도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탄산칼슘]]이므로 지혈효과는 있었겠지만, 닭뼈를 갈아 먹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 일종의 문화재 수난사였다. 그저 무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수천 년 전 고대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기록들이 사람 뱃속으로 헛되이 낭비되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90년대 무렵, 금석학자 유악과 왕의영(王懿榮)이 용골에 새겨진 문양이 고대문자임을 알아내어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청나라 시절에는 [[문자의 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고증학이 발달했는데, 고증학에서 중시하는 분야 중에 한자 자체를 연구하는 소학[* 小學: 조선시대 아동 윤리교습서적 소학이 아니라, 한자 자체를 연구하는 한자학을 말한다.]이 있었다. 왕의영 자신도 금석학자로 상당한 소양을 갖춘 인물이라 옛 한자 지식이 해박하였다.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 달인당(達仁堂)이라는 한약방에서 약재로 구입했던 용골에 적혀 있는 문자가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 이전의 문자임을 직감하고 용골을 구입했던 약방에 문의하여 앞으로 같은 용골이 있으면 자신이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899년]] 한 약재상 혹은 골동상이 대량의 갑골문이 적힌 갑골편을 가지고 와서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는 1931년 한 신문에 석옹(汐翁)이라는 필명으로 쓴 갑골문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계속 인용되면서 사실로 굳어진 것으로, 이 일화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는 모양.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서태후]]와 [[광서제]]가 몽진하고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져 사망했기에 지금 와선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왕의영 사후 그가 남긴 갑골 조각들을 같은 금석학자이며 그의 식객이자 친우였던 유악(劉鶚)이 물려받아 연구하여 철운장귀(鐵雲藏龜)[* 철운(鐵雲)은 유악의 자(字)이다.]라는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갑골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하남성 안양 소둔촌이 갑골의 발굴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발굴 결과 상나라 수도의 옛터(은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은허 발굴 당시 거북이 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이 층층이 겹쳐 있었는데, [[왕국유]]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상나라]] 궁실에서 점복 결과 기록물을 보관하던 건물 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갑골문이 어느 정도 해독이 되자 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의 내용에 주목하였다. 청나라 시대 고증학에서는 오제본기-은본기의 상당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갑골문을 연구할수록 갑골문에서 등장하는 상나라 왕의 묘호와 사기의 왕의 묘호의 순서가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오히려 사기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상나라는 학계에서 고대국가로 인정받게 된다. 청나라 말기에 한 프랑스 학자가 갑골문으로 은나라 역사를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갑골문이 발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생소한 학문은 해외는 물론 중국 본토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후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교체된 뒤 각지에서 [[군벌/중화민국|군벌]] 간의 전쟁으로 치안이 혼란했을 시기에도 은허에서는 갑골문 발굴과 해독이 계속되었다. 민국 말기에는 둥쭤빈(董作賓)이 갑골문 연구를 주도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초반에는 궈모뤄(郭沫若)가 주도했다.[* 참고로 둥쭤빈은 갑골문으로 재구성한 [[상나라]]의 달력인 은역보(殷歷譜)를 집필하였는데, 이게 학계에서 지나치게 난해해 문제가 있다고 평가받긴 해도, 갑골문 학계에선 위상이 있다 보니 상나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덴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은역보를 통해 갑골문을 접했던 한국의 김경일 교수는 은역보의 단점을 거론하면서도 이 책이 학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